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푸시킨 (문단 편집) === 초반 === 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푸시킨의 초상화를 보면 외모가 독특한데, 푸시킨의 외증조부가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1696~1781,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이다.[* '한니발'에서 유래된 이름 맞다. 러시아어에는 /x/는 있어도 /h/는 없고, 전통적으로 /h/ 발음을 /g/에 해당하는 Г로 인식해 왔기에 '한니발'이 '간니발'이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히틀러는 '기틀러', 헤르만은 '게르만'이 되며, 하인리히는 겐리흐가 된다. 다만 현대 들어서는 Х와 Г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똑같은 /h/도 하노이는 Х고 헤라트(아프가니스탄의 도시)는 Г를 쓴다. 그래도 해리포터는 가리 뽀떼르다.] 간니발은 에티오피아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대사 때문에 러시아로 오게 된 인물인데, 표트르 대제가 직접 대부(godfather)로 서 주었을 정도로[* 부칭이 페트로비치인데, 러시아 이름에서 '-비치(vich)'는 '~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해석하면 '표트르의 아들인 간니발 가의 아브람'이라는 뜻이다. 정교도가 아닌 외국인이 개종하며 러시아에 귀화해 러시아식 이름을 지을 때, 부칭은 보통 러시아 정교 세례식에서 대부를 선 사람의 이름을 따른다. 그러므로 부칭이 페트로비치가 된 이유는 표트르가 대부를 섰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를 서 줄 정도로 총애하였음은 마찬가지.] 러시아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간니발 가문은 러시아의 명문가가 되었다. 즉, [[흑백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당시의 관점으로는 빼박 흑인이다. 이후 간니발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로 노예 신분에서 면천된 후 프랑스 유학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많은 학자/철학자들과 교류하게 되며, [[볼테르]]로부터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는 어마어마한 찬사를 들을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사람이다.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푸시킨에게 자신의 뿌리는 그저 그런 노예출신이 아닌 자랑스러운 학자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미인이었지만 흑인의 유전자를 강하게 타고 났는데 알렉산드르는 피부색 말고 미모는 물려받지 못해서 상단 초상화는 초상화답게 150% 정도 미화한 것이고(...) 실제로는 미남과 거리가 멀고 남아있는 스케치 등에서는 생김새도 흑인에 가까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가족들에게도 다소 낯선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은 곱슬 머리에 키 작은 루저라고 놀려댔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 대폭발이라 평생 여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다고 한다. 말빨, 글빨 등 외모보다 매력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지만 결혼 후엔 감시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먹고 사느라 그럴 틈도 없었던 듯. 일반적으로 푸시킨의 외증조부 가니발 장군은 [[에티오피아]] 혹은 현대 [[에리트리아]] 출신으로 알려졌고 한동안 정설이었지만, 현대 근세사학계에서는 그 당시에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던 유럽, 그것도 러시아에선 사하라 이남 흑인들을 그냥 습관적으로 '어비스니아인', 즉 에티오피아로 부르다 보니 생긴 오해로 본다. 무엇보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문학사학자로서도 활동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비롯한 현대 관련 학자들은 오히려 만년에 간니발 장군 본인이 스스로 고향은 "라곤"이라 말했던 점을 빌어 중서부 아프리카 [[차드 호]] 현대 [[카메룬]] 북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네-비르니 지방이었다 본다. 게다가 간니발 에리트리아 출신설을 처음 공식화했던 인류학자 드미트리 아누친의 주장은 열등한 '완전 흑인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이 푸시킨 같은 천재를 배출했을 리는 없으니 그나마 지중해 '문명화된 세계'와 역사적으로 가까웠고 '완전한 흑인'은 아닌 햄계 민족 에티오피아인일 거란 19세기말 [[우생학]]적 유사과학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니발 장군이 러시아 정부에게 귀족 작위를 받을 때 요청하여 하사받은 [[문장(그림)|문장]]이 있는데, 여기에 중간엔 코끼리가 있었고 아래엔 라틴 알파벳으로 FVMMO라 적혀있는데 라틴어의 "Fortuna Vitam Meam Mutavit Oppido" (행운이 이 도시에서 나의 인생을 변하게 했다)의 머리 글자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러시아 문화학자이자 간니발 전기 저자인 휴 반즈에 따르면 이는 차드 호수 근처 [[코토코]]인들의 언어로 '고향'이란 뜻이라고. 간니발은 동거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1736년에 결혼한 두번째 아내인 귀족 혈통의 크리스티나 레지나 세베르크(Christina Regina Siöberg)[* 정확히는 1731년에 결혼한 첫 아내인 그리스 출신 에브도키아 디오페르(Evdokia Dioper)와 1753년까지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던지라 엄밀히 말하면 [[중혼]]이었다.(이로 인해 참회와 고행을 해야 했다.) 이 첫 아내는 강제로 결혼한 남편을 혐오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간니발은 에브도키아가 결혼 초부터 외도를 하고 있단 자신의 의심이 그녀가 백인 딸을 낳으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생각해 그녀를 결국 고발했다. 에브도키아는 11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와 매우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총 10명 낳았고 그 중 하나인 오시프가 푸시킨의 외할아버지였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유모로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푸시킨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푸시킨이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이미 10살 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 때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리쩨이(лице́й)에 입학했다. 리쩨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 때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 [[파일:attachment/알렉산드르 푸시킨/pushkin2.jpg]] [[일리야 레핀]]의 그림.<리체이 시험장에서의 푸시킨>(1911)[* 이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시인 서품식'이라고 표현된다. 당대 거장인 노(老)시인이 어린 시인에게로, 고전주의가 낭만주의에게로 넘어간다는 표상이다.] 17살 리쩨이에서 진급 시험을 칠 때 '차르스코예 셸로[* 오늘날의 푸시킨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푸시킨을 기념하여 이름을 푸시킨으로 바꿨으며 푸시킨이 있었던 리쩨이가 이곳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러시아 황실의 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도 이곳에 있다.]의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푸시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